일본을 대표하는 무사도 스토리 도쿄 미나토구의 츄신구라&아코 로시 연고지 순례
연말의 풍물시로서 매년 이 시기가 되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세글자인 '츄신구라(忠臣蔵)'. 츄신구라의 소재가 된 '겐로쿠 아코 사건'은 에도성과 료고쿠 등 현재의 도심 일대가 무대입니다. 그 중에서도 도쿄 미나토구에는 아사노 타쿠미노카미와 47사가 잠들어 있는 센가쿠지를 필두로 중요 국면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이번 역사 산책은 그러한 츄신구라 연고지를 걸어 보고자 합니다.
아사노 다쿠미노카미와 아코 의사 47사가 잠든 센가쿠지로
이번에는 산책하기 쉬운 루트를 우선시하여 JR 야마노테선의 다카나와 게이트웨이 역에서 신바시 역까지 츄신구라 연고지를 찾아갑니다.첫 번째 목적지인 '센가쿠지'까지는 타카나와 게이트웨이 역에서 도보로 7분 정도 걸립니다.
츄몬(中門)을 통과하면 산몬(山門)이 있고 그 오른쪽을 올려다보면 아사노가 필두 카로 오오이시 쿠라노스케의 동상이 서 있습니다.
센가쿠지는 1612년에 창건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소토 사쿠라다(현재의 The Okura Tokyo근처)에 있었으나 1641년에 일어난 간에이의 대화재로 불탄 뒤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습니다. 아코 번 아사노 가는 그 당시의 부흥에 힘을 쏟은 다이묘 가문 중 하나로, 그 연으로 에도에 있어서 같은 가문의 보리사(조상의 묘가 있고, 장례·불사를 하는 절)가 되었습니다.
센가쿠지는 츄신구라 안에 다수 등장하지만, 특히 중요한 국면의 무대가 되는 것은 이야기 종반의 습격 후. 1702년 12월 15일 동틀 무렵, 혼죠(本所:현재의 료고쿠)에 있는 키라 저택에서 습격을 끝낸 아코 의사는 추격자를 맞아 죽일 각오로 일단은 키라 저택 근처에 있는 에코오인으로 옮겼습니다. 그런데 승려에게 입문이 거부되어 에이타이바시, 예전부터 아코 번의 집이 있던 텟포오즈(현재의 츠키지 근처), 코비키쵸(동 히가시긴자 근처), 그리고 시오도메를 행렬하고 센가쿠사에 도착했습니다.
의사의 목숨과 주군에 대한 충의, 양쪽 모두의 무게를 느끼다
이 때 센가쿠지를 방문한 사람은 도중에 보고하라 임무받은 3명을 제외한 44명 이었습니다. 아사노 타쿠미노카미의 묘 앞에 키라 코오즈케노스케의 목을 두고 숙원을 달성했음을 보고한 쿠라노스케 일행. 그리고 토라노몬에 있는 오오메츠케 센고쿠 호키노카미 저택에 일시적으로 옮긴 후, 4개의 다이묘가의 에도번 저택에 나누어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습격한지 약 2개월 후인 이듬해 2월 4일에 막부의 재정이 내려져 전원 할복 집행 되었습니다.
경내에는 의사와 관련된 유물이 남아 있습니다.그 중에서도 빠뜨리지 않고 봐 두면 좋은 것이 '아코의사 묘지'와 '아코의사 기념관' 입니다.
아코 의사 묘지에서 센가쿠지 수처주사인 무타 켄묘 씨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곳에 잠든 분들은 각각 보리사가 다르지만, 다이묘가에서 막부의 재정을 기다리는 동안 '할복이냐 처형이냐를 논해야 할 때에는 영주님이 잠든 센가쿠지의 어딘가에 묻어달라'고 부탁하셨다고 합니다."
47사의 묘비들이 서로 어깨를 맞대고 있는 듯한 묘지에는 먼 곳에서부터 성묘하러 온 사람들이 줄을 지어 향을 피우고 있습니다.
한편 아코의사 기념관에는 의사 관계자로부터 수집된 유품과 자료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것들은 츄신구라의 팬이라면 누구나가 마음이 요동칠 물건들로 가득합니다.
그것들은 츄신구라의 팬이라면 누구나가 마음이 요동칠 물건들로 가득합니다.
산몬 옆의 소나무는 에도시대부터 있던 것. "아마도 침입 후에 이곳에 도착한 의사들도 저 소나무를 보고 여러가지 생각을 품게된 것이 아닐까요?" 라고 말해 준 무타씨. 그 말을 듣고 나서 다시 산몬 앞에 서보니 더욱 강하게 마음에 와 닿는 것이 있었습니다.
17세에 산화한 절세의 꽃미남도…... 오오이시 쿠라노스케 일행이 할복한 곳으로
센가쿠지를 뒤쪽으로 5분 정도 걸어 연립주택 옆 좁은길을 빠져 나오면 '오오이시 요시오 외 16인 충렬의 흔적'이 나옵니다. 이곳은 습격 후 오오이시 요시오(오오이시 구라노스케) 등 17명이 있었던 히고 구마모토번의 별저가 있던 곳입니다.
지금 있는 부지는 오오이시 쿠라노스케가 할복한 저택의 정원의 일부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쿠라노스케는 '뜻을 이루었으며, 죽게 되었지만 인생의 마지막에 여한은 없다' 라는 의미의 사세구를 남겼습니다. 지금의 가치관으로 보면 의사의 할복은 장렬한 비극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이 구절을 새겨 보면 무사의 본망을 이루고 흩어진 그들에 대해서 결코 비장감 만이 아닌 여러가지 생각을 품게 됩니다.
자, 왔던 길을 조금 되돌아가서 니혼에노키도오리를 왼쪽으로 돌아 히지리자카의 긴 언덕길을 20분 정도 내려가면 케이오나카도오리 상점가의 입구가 보입니다. 이 상점가에는 미카와 오카자키 번주 미즈노가의 시바미타야시키 터가 놓여져 있던 ‘미즈노칸모츠 저택 터’가 있습니다. 이곳에는 9명의 의사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작은 정원과 언내표지판만 있지만 이곳도 마지막을 기다렸던 의사들의 기억이 쌓여있는 곳입니다.
이 부근이 산책의 딱 중간 지점. 상점가에는 다양한 음식점이 줄지어 있으므로 점심을 드신다면 꼭 이 곳에서 즐겨보세요.
명장면의 무대가 되었던 난부자카, 그리고 침공의 계기가 된 아사노 타쿠미노카미 종언지지로
도쿄 메트로 미타선으로 미타역에서 시로카네타카나와역으로 가서, 난보쿠선으로 갈아탄 후 롯폰기 1쵸메역에서 하차. 3번 출구에서 10분 정도 걸어가면 '난부자카'가 있습니다. 이 언덕은 츄신구라 중에서도 명장면으로 유명한 '난부자카유키노와카레(눈의 이별)'의 무대가 된 장소입니다.
난부자카유키(南部坂雪)노와카레'는 아사노 타쿠미노카미의 할복 후에 출가하여 아카사카의 생가로 돌아간 요오젠인(아구리)과 습격 전날에 그녀를 찾아온 오오이시 쿠라노스케가 금생의 이별을 맞이한 장소라고 합니다. 실제로 있었던 일이 아닌 후세에 각색된 이야기 이지만, 언덕 근처에는 미망인이 되어 출가한 요오젠인이 그 후의 생애를 보냈다는 아사노 토사노카미 저택 자리에 세워진 아카사카 히카와 신사가 자리잡고 있어 역사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장소입니다.
쿠라노스케는 키라가에 습격할 계획을 전하고자 요오젠인을 찾아왔지만 저택 안에 첩자가 있는것을 알아채고 거짓으로 이별을 고하고 의사의 연판장을 넣은 보따리를 남긴 채 눈 속을 조용히 떠났습니다."이것이 '난부자카유키노와카레'의 대략적인 줄거리입니다.
그리고 난부자카에서 도쿄 메트로 타메이케산노 역으로 간 뒤, 난보쿠 선으로 신바시 역으로. 신바시역에서 8분 정도 걸어가면 신바시 4쵸메 교차로의 한쪽에는 '아사노 타쿠미노카미 종언지지' 비가 서 있습니다. 이 곳은 에도성 마츠노 로오카 사건으로 코오즈케 노스케에게 칼부림을 당한 후 무츠이치노세키 번주 타무라 사쿄 대부의 저택에 있던 아사노 다쿠미노카미의 할복이 집행된 장소입니다.
아사노 타쿠미노카미는 ‘바람에 흩어지는 꽃보다 서둘러 지는 나는, 이 봄의 아쉬움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라는 의미의 사세구를 남겼습니다. 시비를 불문하고 쌍방을 처벌하는 법이 있던 가운데, 악랄한 처사를 반복하던 키라에게 벌이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소위 ‘편파재정’을 당한 타쿠미노카미의 원통함은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조금 전의 오오이시 쿠라노스케의 사세구와 양쪽 구절을 함께 새겨보면 절로 눈물이 나오게 됩니다.
츄신구라 팬들의 마음을 계속해서 사로잡는 '셋푸쿠 모나카'
마지막으로 방문한 곳은 타무라 사쿄 대부 저택 터에 위치하고 있는 전통있는 화과자점 '오카시 츠카사 신쇼도'입니다.이 곳의 명물은 아코 의사를 본따서 고안된 '셋푸쿠(할복) 모나카'입니다.
할복을 연상시키는( ?! ) 깍지에서 튀어나오는 듯한 앙금이 강렬한 임팩트. 앙금 안에는 큐히가 들어있으며 깍지의 바삭바삭한 느낌도 특징 중 하나.
이번 역사 산책에 어울리는 선물도 찾았으니 신쇼도의 주인에게 "왜 츄신구라는 시대를 초월해 일본인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것일까요?" 라고 물어보았습니다. ”그것은 요즘 사람들이 잊어버린 일본인의 모습이 츄신구라안에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라는 깊은 생각이 담겨져 있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신바시역으로 향했습니다.
이미 소설이나 영화등에서 츄신구라를 알고 계시는 분도 역사의 무대를 걷다 보면 이야기의 맛이 한층 더 깊어질 것입니다. 꼭 이 기사를 참고로 하셔서 아코 의사 연고지 순례를 즐겨보세요.